사도행전 9장 32-43절 “경계를 넘어서” / 찬40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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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속으로 04 - 택한 나의 그릇 (40. 무두장이의 집에서 (사도행전 9장 36–43절))
아름다운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던 욥바의 다비다가 죽었을 때, 그녀를 사랑하던 욥바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녀의 시신을 씻어 1층이 아닌 다락방에 안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욥바의 인근 도시인 룻다에 있던 베드로에게 두 사람을 보내어 도와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이에 지체 없이 욥바에 이른 베드로는 다비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다락방으로 올라가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고, 그 결과 다비다는 주님의 은총으로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죽었던 다비다가 다락방에서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부활 주일이었던 지난 시간에 그 다락방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욥바의 다비다에 관한 단락의 마지막 구절인 본문 43절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무두장이는 가죽 제조 기술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2천 년 전 유대인들은 무두장이를 최하층 천민으로 규정하여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죽은 짐승을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만약 죽은 짐승을 누군가가 만진다면 그 사람은 곧 부정을 타게 되고, 부정을 탄 사람이 만지는 모든 것, 심지어는 그가 먹는 음식까지도 부정을 타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들은 무두장이를 인간으로 취급할 수 없었습니다. 무두장이는 짐승의 가죽을 얻기 위해 늘 죽은 짐승 다시 말해 부정한 것을 만지는 부정한 존재요, 부정한 그의 손이 닿는 모든 것이 부정해질 뿐 아니라, 부정한 무두장이와 관계를 맺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이 부정해짐을 의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무두장이와는 아예 상종조차 않으려 했고, 세상으로부터 경원당한 무두장이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이 살지 않는 외딴 곳에서 혼자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 옛날 철저한 가부장적 사회였던 이스라엘에서 결혼한 여자가 남편을 상대로 먼저 이혼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일이 가능한 단 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여인이 모르고 결혼했다가 뒤늦게 남편의 직업이 무두장이임을 알았을 경우, 그 여인은 무조건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 부정한 무두장이는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신이상자가 아니고는, 적어도 정상인이 무두장이의 집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두장이의 집에서 자기 위해서는 부정한 무두장이의 부정한 침대에서 부정한 무두장이의 부정한 이불을 덮어야 하고, 부정한 무두장이의 부정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야 하고, 부정한 무두장이의 부정한 식사 도구로 부정한 무두장이가 만들어 준 부정한 음식을 먹어야 하고, 부정한 무두장이가 사용하는 부정한 변소에서 용변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게 만드는 첩경이었기에, 정상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을 모시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청을 마다하고, 사람들이 그 근처에 가는 것조차 꺼리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그것도 하루가 아닌 여러 날을 묵었습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것을, 초기 기독교회가 인간의 신분과 직업에 대한 그릇된 계급의식을 타파한 획기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만이 모두인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유독 무두장이의 집을 자신의 유숙지로 삼았다는 것은 그보다 훨씬 심오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이라면 죽은 짐승의 시체를 다루는 무두장이를 예외 없이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무두장이와 아예 상종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무두장이가 사는 곳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두장이의 손이 닿기만 하면 부정을 타게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무두장이를 부정하게 간주하고 경원하던 유대인들 가운데, 무두장이의 손으로 만들어진 가죽제품을 부정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옷, 벨트, 신발, 가방 등 가죽 제품은 그들의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주요 필수품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 역시 이왕이면 고급 제품을 선호하였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무두장이가 부정하다 하여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을 부정하게 간주한다면, 무두장이가 만든 가죽 제품 또한 부정하게 취급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일상생활 속에서 가죽 제품을 귀하게 여긴다면, 그 귀한 제품을 만드는 무두장이를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유대인들은 무두장이를 부정한 존재로 단정하여 경원하면서도, 무두장이에 의해 만들어진 가죽 제품은 더없이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이율배반이요, 가공할 이중성입니까? 이보다 더 큰 모순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도 베드로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을 유숙지로 정하였습니다. 그를 모시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욥바에 무두장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베드로는 주저 없이 무두장이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베드로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무두장이의 이불을 덮고 잠을 잤습니다. 아침에 세수한 뒤엔 무두장이의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습니다. 무두장이와 함께 무두장이가 만든 음식을 먹었습니다. 하룻밤이 아니라 욥바를 떠나기까지 여러 날 동안 그 무두장이의 집에서만 머물렀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에 의해 그릇된 계급의식이 타파되었음을 뜻하기 이전에, 베드로에게 내재되어 있던 내적 모순과 이중성이 진리 안에서 극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도 유대인이었다는 것은, 베드로 역시 가죽 제품은 소중히 여기면서도 무두장이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던 이율배반적 이중성, 그리고 자기모순 속에서 살아왔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인간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이중성과 자기모순을 진리 안에서 극복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되어져야 할 자신과 현재의 자기 자신 사이에 통합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 내적 통합이 이루어지는 사람의 삶은 자연히 외적 모순, 즉 사회적 모순을 제거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내적 통합 없이 외적 모순만을 제거하려 할 때, 외적 모순은 또 다른 모순을 잉태할 뿐 결코 제거되지 않습니다. 내적 통합이 결여된 사람이 행하는 모든 행위는 결국, 자기 속에 도사리고 있는 자기모순의 외적 변형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 아니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백정白丁, 즉 푸줏간에서 소와 돼지 같은 가축을 잡는 사람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였습니다. 우리말에는 엄연히 존댓말이 있습니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자기보다 손윗사람에게 반드시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관습이요, 윤리입니다. 그러나 백정에게는 어린아이라도 반말을 썼습니다. 그것은 가축을 도살하는 백정은 인간이 아니라는 사회적 통념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쇠고기와 같은 육류를 싫어했는가 하면,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전통적으로 가난했던 우리 민족은, 잔칫날이나 명절이 어서 돌아와 쇠고기를 먹을 수 있기를 손꼽아 기다리곤 했습니다. 손님을 대접할 때 쇠고기가 빠지면 손님을 소홀히 여기는 것으로 간주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쇠고기를 좋아했으면서도 소를 잡는 백정만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가죽 제품은 소중하게 다루면서도 무두장이는 인간 이하로 취급했던 유대인과 똑같은 이중성과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백정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도축장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반말하는 어린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내부의 이중성과 자기모순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내적 모순과 이중성은 여전히 우리 속에 도사리고 앉아, 시간과 장소에 따라 여러 형태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요즈음 봄이 되어, 주말이면 쇄도하는 청첩에 응하느라 정작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다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관혼상제와 관련하여 허례허식을 없애자는 것은 벌써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국민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자신의 경우가 되면, 이를테면 자신이나 자기 가족의 결혼식 혹은 장례식은 예외로 합니다. 그래서 명함철을 펼쳐 놓고 누군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연락을 합니다. 자신의 경우를 예외로 하려면 허례허식을 없앨 생각을 아예 하지도 말아야 하고, 우리 사회에서 정말 허례허식을 일소하려면 자신의 경우에서부터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구 선진 국가에서 사는 한국인치고 그 나라 국민들의 수준 높은 법질서의식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시 그와 같은 사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살던 사람이 귀국한 뒤에는,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외국에서처럼 교통법규나 신호를 철저하게 지키는 일은 드뭅니다. 이유인즉 이곳에서는 대다수가 교통법규를 제대로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우리 사회의 법질서를 확립하기 원한다면, 어떤 불편이 있더라도 내가 먼저 법과 질서를 준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먼저 준수하려 하지 않을 경우,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먼저 행할 리 만무합니다. 만약 내게 그런 실천 의지가 없다면,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사람을 비방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이중성과 자기모순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예외인 것은 아닙니다.
무릇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진정한 그리스도인, 진리의 향기를 풍기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인, 진리에 의한 자기 부인을 행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부부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꾸려 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상대가 먼저 자기에게 맞추어 주기만을 요구합니다.
모든 부모는 자기 자식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부모 자신이 세속적인 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사느라, 자식들 앞에서 신앙의 본이 되지는 않습니다.
모든 자식들은 효자 효녀란 소리를 듣기 원합니다. 그러나 늙고 돈 없는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자식들은 흔치 않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교회가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는 교회 갱신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각자 자신의 일터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진리와 신앙의 양심에 따라 사는 일에는 소홀합니다.
서로 사랑하자고 외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46–47절에 언급하신 세리와 이방인처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려고 합니다.
봉사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목전의 이득에 관한 한, 호리毫釐도 양보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으로부터 상처받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언행이 수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에는 둔감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 속에서 진리의 열매가 거두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먼저 썩어지는 진리의 밀알이 되기는 거부합니다.
부활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시발점인 자기 십자가를 지려 하지는 않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자신과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매사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 하지는 않습니다.
영생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을 자신의 목적지로 삼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적나라한 실상입니다. 그렇다면 가죽 제품은 선호하면서도 무두장이는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던 유대인들, 쇠고기는 좋아하면서도 백정은 인간 이하로 취급하던 옛 사람들—그들과 우리 사이에 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모든 인간 속에는 이율배반적인 이중성과 자기모순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나 있기 마련인 사회적 모순의 출처는 바로 인간 내부입니다. 인간의 내적 이중성은 더 큰 이율배반을 낳고, 모순은 또 다른 모순의 모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내적 이중성과 모순이 진리 안에서 극복될 때에만,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으로서 되어져야 할 자신과 현재의 자기 자신 사이의 간격이 진리로 메워지고 그 양자가 통합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이 사회의 모순을 제거해 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인격자란 그 양자의 간격이 통합된 사람을, 그리고 인격분열은 그 양자의 간격이 더 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고기 잡던 어부였을 뿐, 단 한 번도 체계적인 정규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가 세상의 모순을 제거하고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꾼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진리 안에서 자기 통합을 이룬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가죽 제품은 귀하게 여기면서도 그것을 만드는 무두장이는 인간 이하로 취급하던 자기모순과 이중성을 극복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욥바의 많고 많은 집을 마다하고 무두장이의 집에서 유숙하였고, 결과적으로 무두장이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던 사회적 모순과 이중성을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자기 내적 모순의 극복 없이 사회적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 밖으로 뛰쳐나가기만 했다면, 하나의 모순을 없애기 위해 더 많은 모순의 씨를 뿌리는 혁명가가 될 수 있었을는지는 몰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바른 역사의 좌표를 보여 주는 진리의 사도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스스로 자기모순을 극복하고 자기 통합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 가능하였습니다. 인간 속에 도사리고 있는 이중성과 자기모순을 제거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주님이시요, 되어져야 할 자신과 현재의 자기 자신을 통합해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모든 이중성과 자기모순이 못박혔습니다. 다시 말해 그 십자가 위에서 현재의 자신은 죽고, 되어져야 할 자신으로 부활함으로 주님 안에서 자기 통합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만, 우리의 참된 내적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통합을 이루고 무두장이의 집에서 유숙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베드로 속에 계신 주님의 위대하심으로 인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분을 우리의 중심에 모시어 들이십시다. 그분의 십자가를 삶의 푯대로 삼으십시다. 영원한 진리이신 그분의 말씀 속에 거하십시다. 그때부터 나의 내적 이중성과 모순이 제거됩니다. 그때부터 나의 내적 통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때부터 내 안의 무두장이와는 말할 것도 없고, 내 밖에 있는 무두장이와의 통합도 이루어집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비로소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자신의 배우자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자식에게 본이 되는 믿음의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이 사회의 모순을 몰아내는 진리의 증인, 진리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때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호칭에 걸맞게,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임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 베드로를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되게 하신, 바로 그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도 나를 불러 주시고 본문 말씀을 통하여, 가죽 제품은 좋아하면서도 무두장이는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던 유대인의 이중성이, 바로 나 자신의 이중성임을 일깨워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의 영안을 열어 주시고,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자기모순을 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 모든 내적 모순과 이중성의 제거와 자기 통합은, 오직 주님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함을 깨우쳐 주심도 감사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만을 나의 구주로 모시고, 날마다 주님 안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위에 나의 인생을 세우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 속에서 나의 인생을 엮어 가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나의 내적 모순과 이중성을 제거해 주시고, 되어져야 할 나와 현재의 나 자신 사이에 자기 통합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내 안에 있는 무두장이와는 물론이요, 내 밖에 있는 무두장이와도 통합이 이루어진 이 시대의 베드로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나의 가정에서, 나의 일터에서, 내가 속해 있는 이 사회 속에서, 성숙한 인격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나의 삶을 통해, 이 세상의 모순을 일소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날마다 펼쳐지게 하옵소서. 아멘.